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렌지 혁명 (문단 편집) == 이후 == 하지만 개혁 노선 차이로 유셴코 대통령과 [[율리야 티모셴코]] 총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정적으로 돌변했다. 친서방 지도자로서 개혁을 주장하던 티모셴코 총리와는 달리 유셴코 대통령은 친러 세력의 불만을 달래기 위해 어느 정도 눈치를 보아야 했다. 특히 티모셴코 총리와 갈등을 빚던 유셴코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하고 재선거를 실시하고 티모셴코를 '''해임'''하는 초강수를 두면서까지 막나가던 티모셴코를 견제하려고 했다. 심지어 유셴코는 자신의 경쟁자였던 야누코비치를 총리로 임명하기도 했다. 그래도 당시는 호경기였기 때문에 경제가 급속하게 성장하는 편이었지만 결국 [[대침체]]의 후폭풍[* 사실 금융위기 이후 타격을 입은 경제를 회복하지 못한 우크라이나가 경제지원을 위해 EU와 러시아와 협상했음을 감안하면 유로마이단의 '''간접적인 원인'''이기도 하다.]으로 1인당 GDP가 3,900달러에서 2,500달러로 떨어지면서 우크라이나 경제가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IMF]]가 우크라이나에 금융지원을 하였으나, 우크라이나는 IMF가 요구하는 구조조정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그 반동으로 결국 [[2010년]] 2월에 치러진 [[2010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대선]]에서 야누코비치 전 총리가 1차 투표에서 유셴코를 탈락시키고 2차 투표에서 경쟁자였던 티모셴코를 꺾고 당선되면서 다시 [[친러]] 성향을 보였다. 당장 전 정부에서 추진하던 [[나토]] 가입을 철회했고 특히 야당의 강력한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2010년 4월 [[흑해]] 주둔 [[러시아 해군]]의 철수도 취소하고 시한을 2017년에서 2042년으로 연장시켰다. 사실 당시에야 야누코비치와 우크라이나 정부는 훗날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같은 일이 일어날지 몰랐겠지만[* 이미 우크라이나는 1994년에 [[부다페스트 안전 보장 각서]]로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신 크림 반도 등의 영토 주권을 보장받고 1997년에 최종적으로 러시아와 크림반도 영유권 문제를 해결했다.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설마 러시아가 이를 어길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는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무혈점령하는 가장 큰 '''병크'''가 되어 버렸다. [[파일:Hza8fT6.png]] 오렌지 혁명은 단지 정치적인 시위에만 그치지 않아서 위의 지도(2010년 대통령 선거. 적색이 티모셴코, 청색이 야누코비치)에서 볼 수 있듯이 지역에 따라 친러 성향과 친서방 성향으로 극명하게 갈렸다. 결선투표에서 티모셴코는 서부 지역에서 최대 91%, 야누코비치는 동부 지역에서 최대 93%를 득표했는데 우크라이나 대선에서는 기권표도 집계하는 걸 감안하면 93%면 한국 기준으로는 95% 넘게 득표한 셈이다. 이렇게 우크라이나가 내부적으로 앓던 갈등은 결국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유로마이단 혁명]]과 [[돈바스 전쟁]],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란 최악의 형태로 터져 버렸다.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his=문단, title=우크라이나, version=1750, paragraph=11.2)] [[분류:2004년 시위]][[분류:2005년 시위]][[분류:민주화 운동]][[분류:유럽사]][[분류:우크라이나의 역사]][[분류:러시아-우크라이나 관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